작가 소개
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일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인간이 느끼는 ‘에너지’, ‘감정’, ‘감성’, ‘영감’ 등을 그림이나 작품으로 표출하는 ‘영매(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을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융의 분석미술치료에서 말하는 ‘치유가 일어나는 과정’이며 또한 동시에
헤롤드 로젠버그가 말한 작가에게 자기창조 (자기극복,자아초월,자기표현,자아실현 등)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그림 그리는 행위를 '오토마틱 채널링 액션페인팅 (Automatic-channeling Action-painting )’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의 영감을 캔버스에 토해내고 있다.
작품 소개
< ‘To be, or not to be’ Series 작품의도>
‘공간(空間)’은
“1. 아무것도 없는 빈 곳
2.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3.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4.기계 물질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 고전 역학에서는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사용하였는데,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을 포함한 사차원의 리만 공간을 사용한다.
5.수학 어떤 집합에서 그 요소 사이 또는 그 부분 집합 사이에 일정한 수학적 구조를 생각할 때, 그 집합을 이르는 말. 이에는 n차원 공간, 위상(位相) 공간 따위가 있다.
6.철학 시간과 함께 세계를 성립시키는 기본 형식. 유물론에서는 공간의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만 칸트 철학에서는 이를 선험적인 직관 형식으로 파악한다.” 을 가리킨다.
저는 '존재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연작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존재를 통한 ‘공간의 실존’과 ‘온 우주의 현존’을 표현하기 위한 연작 작업입니다.
제가 느끼는 영적 공간의 다양한 에너지의 흐름과, 파동, 멈춰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모든 시간들의 변화들을 표현하였으며, 그 영적 공간을 이루는 홀로그램적인 다양한 색감을 캔버스에 담아 냈습니다.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때 변하는 빛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글리터의 반짝임을 통해 시간과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해 '존재'라는 의미에 대해 재조명하고, ‘실존' 혹은 ‘ 현존’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은 이해를 더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은 미지의 것입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도, 의미 상 ‘존재의 현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몸에 의한 ‘의식적 감각’을 제외하고도 ‘인간의 현존’과 ‘실존’의 증명할 수 있듯이 ‘공간’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몸이라는 실체, 눈과 귀와 다양한 감각이 선물하는 놀라운 '의식의 감각 세계' 뒤에 존재하는, 무의식이 확장된 인간의 감각 한계 이상에 현존하는 존재들과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저 존재하는 이 영감들과 자연의 에너지, 생명 파동의 흐름, 무의식에 존재하는 다양한 원형들을, 제가 보고, 느끼는 대로, ‘온 우주적 영적 에너지’에 의해 캔버스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합니다.
에너지적 차원 혹은 원소적 차원에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에너지’로 존재하기에, ‘존재’와 ‘존재’의 ‘소통(connection)’은 이 ‘에너지의 파동’이 서로의 ‘파장’에 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공간’ 또한 존재에 의한 것이나 동시에 존재에 의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니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즉 누군가의 존재나, 인식으로 인해 공간으로 명명 되어지기에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듯 하지만, 그 곳은 그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분히 인간의 '의식적 시각과 감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 볼 때 그들이 그저 ‘거기에 있음’,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이름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들은 그 곳에 늘 존재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흔히 과학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상과 이념, 이론들을 추구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느끼며, 소통하고, '의식의 감각 세계'의 창구인 캔버스 위에 토해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상과 그들에 의해 소외받기 쉬운 우리의 무의식 세계 속 존재들 혹은 영적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매개체, 즉 ‘자아 초월적 샤먼’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실존을 증명 받을 수 없는 영적 공간에 존재하는 그들의 형태를 '동적 행위예술 과정'인 ‘오토마틱 채널링 액션페인팅’을 통해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현존을, 캔버스에 담아 그 존재의 현존을 드러냄으로써 ‘존재의 인식’, 즉 ‘존재의 공간’을 완성하였습니다.
To be, or Not to be 14, 캔버스에 혼합 재료, 100.0 x 65.2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5, 캔버스에 혼합 재료, 100.0 x 65.2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6,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2022
To be, or Not to be 17,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8,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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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일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인간이 느끼는 ‘에너지’, ‘감정’, ‘감성’, ‘영감’ 등을 그림이나 작품으로 표출하는 ‘영매(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을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융의 분석미술치료에서 말하는 ‘치유가 일어나는 과정’이며 또한 동시에
헤롤드 로젠버그가 말한 작가에게 자기창조 (자기극복,자아초월,자기표현,자아실현 등)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그림 그리는 행위를 '오토마틱 채널링 액션페인팅 (Automatic-channeling Action-painting )’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의 영감을 캔버스에 토해내고 있다.
작품 소개
< ‘To be, or not to be’ Series 작품의도>
‘공간(空間)’은
“1. 아무것도 없는 빈 곳
2.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3.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4.기계 물질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 고전 역학에서는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사용하였는데,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을 포함한 사차원의 리만 공간을 사용한다.
5.수학 어떤 집합에서 그 요소 사이 또는 그 부분 집합 사이에 일정한 수학적 구조를 생각할 때, 그 집합을 이르는 말. 이에는 n차원 공간, 위상(位相) 공간 따위가 있다.
6.철학 시간과 함께 세계를 성립시키는 기본 형식. 유물론에서는 공간의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만 칸트 철학에서는 이를 선험적인 직관 형식으로 파악한다.” 을 가리킨다.
저는 '존재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연작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존재를 통한 ‘공간의 실존’과 ‘온 우주의 현존’을 표현하기 위한 연작 작업입니다.
제가 느끼는 영적 공간의 다양한 에너지의 흐름과, 파동, 멈춰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모든 시간들의 변화들을 표현하였으며, 그 영적 공간을 이루는 홀로그램적인 다양한 색감을 캔버스에 담아 냈습니다.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때 변하는 빛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글리터의 반짝임을 통해 시간과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해 '존재'라는 의미에 대해 재조명하고, ‘실존' 혹은 ‘ 현존’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은 이해를 더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은 미지의 것입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도, 의미 상 ‘존재의 현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몸에 의한 ‘의식적 감각’을 제외하고도 ‘인간의 현존’과 ‘실존’의 증명할 수 있듯이 ‘공간’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몸이라는 실체, 눈과 귀와 다양한 감각이 선물하는 놀라운 '의식의 감각 세계' 뒤에 존재하는, 무의식이 확장된 인간의 감각 한계 이상에 현존하는 존재들과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저 존재하는 이 영감들과 자연의 에너지, 생명 파동의 흐름, 무의식에 존재하는 다양한 원형들을, 제가 보고, 느끼는 대로, ‘온 우주적 영적 에너지’에 의해 캔버스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합니다.
에너지적 차원 혹은 원소적 차원에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에너지’로 존재하기에, ‘존재’와 ‘존재’의 ‘소통(connection)’은 이 ‘에너지의 파동’이 서로의 ‘파장’에 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공간’ 또한 존재에 의한 것이나 동시에 존재에 의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니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즉 누군가의 존재나, 인식으로 인해 공간으로 명명 되어지기에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듯 하지만, 그 곳은 그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분히 인간의 '의식적 시각과 감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 볼 때 그들이 그저 ‘거기에 있음’,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이름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들은 그 곳에 늘 존재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흔히 과학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상과 이념, 이론들을 추구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느끼며, 소통하고, '의식의 감각 세계'의 창구인 캔버스 위에 토해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상과 그들에 의해 소외받기 쉬운 우리의 무의식 세계 속 존재들 혹은 영적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매개체, 즉 ‘자아 초월적 샤먼’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실존을 증명 받을 수 없는 영적 공간에 존재하는 그들의 형태를 '동적 행위예술 과정'인 ‘오토마틱 채널링 액션페인팅’을 통해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현존을, 캔버스에 담아 그 존재의 현존을 드러냄으로써 ‘존재의 인식’, 즉 ‘존재의 공간’을 완성하였습니다.
To be, or Not to be 14, 캔버스에 혼합 재료, 100.0 x 65.2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5, 캔버스에 혼합 재료, 100.0 x 65.2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6,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2022
To be, or Not to be 17,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 2022
To be, or Not to be 18, 캔버스에 혼합 재료, 53.0 x 33.3 cm, 2022